原宿 エピファニー
HARAJUKU EPIPHANY
Narita Brian X Cabernet CampBell
ⓒ2024 2b/@2bcms
모처럼 날이 좋았다. 하늘은 청명하고, 공기는 맑았으며 해는 딱 기분 좋을 만큼 따스했다. 여름이 시작되면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땅이 끓기 마련인 도쿄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산뜻한 초여름 날씨. 브라이언은 모처럼의 날씨를 만끽하며 잘 관리된 대로변을 걸었다.
그들이 은퇴 이후로 맞는 첫 번째 여름. 브라이언은 아리마 기념이 치러지던 날의 모든 것을 여즉 생생히 기억했다.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관중, 뺨을 쉼 없이 스치던 바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질주, 그리고 잔디밭에 누워 환하게 웃던 벨. 그들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 꿈이 끝나버린 순간. 한 세계가 닫힌 날,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엿본 그날.
브라이언은 아직 그들이 찾아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단서를 조금도 얻지 못한 채였다. 그는 그 사실이 조급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그들이 달려온 시간은 헛되지 않았기에, 그 시간이 자신에게 남긴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에. 그러나 벨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벨은, 브라이언 자신보다 훨씬 섬세한 이였고, 쉽게 부서지는 마음을 끌어안고도 몇 번이고 부딪히는 이였으니.
오늘의 외출은 벨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아직도 제 앞에서 다소 서투른 모습을 보이는 벨이 먼저 만남을 제안했고, 브라이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이언은 지금의 관계에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브라이언은 무엇이든 현재에 쉬이 만족하지 않았다. 벨과의 관계가 전과 비교해 몹시 가까워진 것은 알았으나, 이다음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더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이상, 벨과의 친교에 있어 타협할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다음 골목의 작은 서점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간까지는 앞으로 10분. 이르게 도착할 것이 분명했지만, 브라이언은 오히려 걸음을 빨리했다. 벨은 자신이 먼저 제안한 약속에, 시간을 딱 맞춰 나올 인물이 아니니. 적어도 30분 전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확률이 훨 높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브라이언의 추측은 반쯤 맞았다.
벨은 30분 전부터 미리 도착해 브라이언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1시간 전부터 미리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한 벨이 한 일은 작은 서점에 들어가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아무리 타오르지 않는다 한들 도쿄의 여름은 장시간 밖에 있기엔 무리가 있었다. 예상보다 몹시 이르게 도착했다는 사실에 잠시 당황하던 벨은 이내 서점에 들어섰다. 에어컨을 틀어둔 서점 내부의 공기는 쾌적했고, 작은 규모지만 이리저리 미로처럼 얽힌 서가 덕분에 직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 딱 알맞았다. 마침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또한 벨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한몫을 했다.
꼭 다락방에서 보물창고를 찾는 것처럼, 서가 사이를 유영하듯 돌아다니던 벨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듯, 걸음을 멈춘 뒤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냈다. 혹시라도 브라이언이 밖에서 기다리거나, 엇갈릴 가능성을 없애기 위하여 미리 연락을 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서둘러 메시지를 한 줄 남긴 벨은 다시 마음 놓고 책장을 자유로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책장 중 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중고 서적이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작은 규모에 비해 책이 많다 싶더니, 중고 도서를 매입하고 새로 가격표를 붙여 판매하는 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책들은 대체로 깔끔했으나, 간혹 표지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빛이 바랜 책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각각의 꼬리표에는 손으로 적은 것 같은 가격표가 붙어 있었고, 그중 몇 권을 꺼내 펼쳐보니 전 주인이 남긴 메모 같은 것도 고스란히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서점의 주인이 누구인진 몰라도, 이런 유의 사소한 사람 간의 연결이나 인연을 중요시하는, 퍽 낭만 있는 인사인 듯싶었다.
몇 권의 책을 꺼내 훑어보고, 다시 꽂아두길 반복하던 벨은 표지에 적힌 제목조차 정확히 알아볼 수 없는 책을 무심코 꺼냈다. 제목과 작가명이 흐려져 정확히 알 수 없는 책은 손때를 많이 탄 듯, 페이지 끝부분이 많이도 헤져 있었다. 그런 초라한 겉모습에서 무슨 매력을 느낀 것인지, 벨은 홀린 듯 페이지를 넘겼다.
두껍지 않은 책의 책장은 금방 넘어가, 마지막 페이지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책을 완전히 덮은 벨은 빛바랜 표지를 몇 차례 멍하니 쓸었다. 계산하지 않은 책을 전부 읽어버리는 무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 벨은 그 낡은 책을 끌어안고 책장에 기대앉을 수밖에 없었다.
벨은 아주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적, 처음으로 꿈이라는 것을 알고,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고, 어떤 인물이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때의 기억을.
그때 자신이 입 밖으로 무슨 꿈을 꺼냈는지 벨은 이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대답을 들은 주변의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똑똑히 기억했다. 말도 안 된다는 부정과 네가 해낼 수 있을 리 없다는 조롱, 그리고 참 유치하지만 원색적이었던 비난들……. 그래서 벨은 그리 생각했었다. 어쩌면 이런 꿈을 꾸는 것은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내 운명은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벨은 책의 첫 번째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등장했다. 벨 자신이 지금 앉아 있는 하라주쿠 한복판에서 어떤 여자를 본 남자가. 예쁘거나 어리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던 그 여자를 보고, 뒤늦게야 그 여자가 혹시 자신의 운명의 상대는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떠올린 남자가.
그 남자는 친구에게 이리 말했다.
‘만약 내가 그 여자를 다시 만난다면 난 이렇게 말할 거야. 우리는 사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전생에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고 말이야.’
벨은 그 구절을 다시 한번 읽고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리고 상상했다. 자신이 하라주쿠 한복판에 서 있는 브라이언에게 말을 거는 상상. 그들은 단 한 번도 경기에서 마주친 적이 없고, 같은 학교에 다닌 적도 없는, 완전히 초면의 상대다. 그러나 브라이언에게 벗의 운명을 느낀 벨은, 평소의 주저하는 태도를 버리고 다가가 말을 건다.
“당신, 우리가 사실 아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남자가 이어 말했다.
‘우리는 아주 먼 옛날 만났고, 우리가 운명의 상대임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때 생각했어요. 이대로 헤어지자고. 만약 우리가 진정 운명의 상대라면 반드시 다시 만날 테니까요.’
벨은 브라이언에게 말한다. 브라이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어쨌든 벨은 말한다.
“우리는 사실 아주 먼 옛날, 라이벌로서 함께 질주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때 깨달았죠. 우리는 서로의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라이벌이라고, 우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기쁨을 찾는, 서로를 지탱해 주는 둘도 없는 파트너라고.”
여자의 표정을 살피지 않은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지며 약속했죠.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결혼하기로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 마지않는 운명의 상대니까,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진정 우리의 운명을 확인하게 된다면 그때는 결혼하는 거예요.’
브라이언의 얼굴은 커다란 가로수의 그늘에 가려 형형한 두 눈만이 빛났다. 벨은 다시 한 번 말을 꺼낸다.
“우리는 그때 약속했어요. 우리는 완벽한 라이벌이었으니, 다음에 다시 한번 만난다면 그때는 친구가 되자고. 우리는 아직 많이 서툴고, 친구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잘 모르지만, 다시 한번 만난 우리는 분명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남자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다만 이것은 전부 남자의 상상 속 이야기. 현실의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의 100퍼센트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책 속 두 사람의 이야기일 뿐. 벨과 브라이언의 이야기는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비웃음 사지 않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평범한 꿈을 꾸고, 평범하게 살아가겠노라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벨, 너는 결코 그런 우마무스메가 아니다.”
“그때는 그런 우마무스메였어요. 꿈도 없고, 달리기를 좋아하지도 않고, 꿈을 이룬 적도 없는.”
“그렇지만 벨, 너는 네가 바라는 길을 택하고 그것을 직접 개척해 나갔어. 질주하는 우마무스메답게 앞으로 쉼 없이 달려 나갔어.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네가 모든 것을 선택해 나아가기로 결심했지.”
“그러니까 그건 전부 브라이언 씨와, 트레센 학원에서 만난 모두 덕분인걸요.”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것을 후회하나?”
“……그럴 리가요.”
벨의 상념을 방해한 것은 딸랑이는 작은 종소리. 벨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차림을 정돈했다. 빛바랜 책을 여전히 품에 안은 채, 미로 같은 서가를 빠져나가 작은 서점의 문이 보이는 곳까지 걸어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는,
“브라이언 씨!”
벨의 라이벌이 있다. 영원한 경쟁 상대, 동지, 그리고 친구. 함께 승리를 향해 구애하는 나의 동료.
“오래 기다렸나?”
“아뇨,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 그럼 이만 가도록 하지.”
“아, 그 전에, 잠시만요. 계산할 책이 있어요.”
브라이언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벨은 계산대의 직원에게 다가가 책을 내밀었다. 심상치 않은 책의 상태를 살핀 직원은 고민하는 어조로 말했다.
“음, 보통 이렇게까지 손상된 책은 판매하지 않는데……. 이대로 구매해도 괜찮으시겠어요? 꼬리표에 적힌 가격 그대로 구매하셔야 하거든요.”
“물론, 괜찮아요.”
“아, 원하신다면 제목과 저자를 찾아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도서 목록과 금세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음,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건 이대로 가져가도록 할게요.”
“네, 그럼…….”
벨이 값을 치르자, 직원은 정성스레 책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제목과 저자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르는 채로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건 단순히 어떤 남자와 운명의 상대인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이것은, 어떤 라이벌에 대한, 이번에는 친구가 되기로 결정한 두 승자의 이야기니까. 그렇기에 벨은 책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직원이 포장한 책을 담아 건네준 봉투를 말없이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직원의 인사를 뒤로하고 브라이언과 함께 서점을 나서자 잊고 있던 여름의 열기가 전신을 강타했다. 조금 전보다는 강렬해진 태양과, 뜨거운 바닥, 그러나 모든 것을 익혀 버릴 듯 구는 한여름의 무자비한 온도와는 다른, 초여름의 공기.
벨은 고개를 들어 브라이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벨의 운명의 상대가 있었다.
우리는 라이벌인가요?
글쎄.
다시 만난다면 친구가 되기로 했으니, 우리는 이번에는 친구가 될 거예요.
브라이언의 답변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벨은 그것이 불안하지 않았다. 제 곁의 브라이언과 함께라면, 그들은 언제고 한계에 도전하고 승리하고, 꿈을 찾아 떠날 수 있을 테니. 벨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 될 테니.
여름의 하라주쿠, 그곳에 있는 우마무스메 둘. 그중 한 명에게 찾아온 작은 에피파니. 우리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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