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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ing

개인 드림 백업 티스토리

네버 스탑 리포스트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전의 봄. 신입생도 재학생도 설레는 두근거림을 안고 맞이하는 오늘 밤, 당신과 함께 춤을──『리뉴•드로와트』. 통상 드로와. 학생들 주최로 체육관에서 열리는 사교댄스파티. “데이트”라는, 이른바 댄스 파트너를 발 빠르게 찾아다녀 함께 춤실력을 갈고닦으면서, 화려한 무대에서 서양 영화의 한 장면을 찍어내듯 봄을 장식한다. 
 
나리타 브라이언은 옥상에서 심드렁하게 드러누워, 그런 건 역시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춤이나 라이브를 레이스의 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위닝 라이브도 아닌 드로와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올해도 학생회 부회장으로서 참가 권유는 날아오겠지. 학생회가 참석하면 구경꾼이나 참가인이 늘어 드로와의 전체 참가율이 올라간다. 그럼 회장이 바라는 그림에 가까워질 테고, 나아가 학원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니까 권유는 끊이질 않는다. 그래도 부회장의 직책에 책임을 느낀다기보다는, 내키는 먹잇감의 유무를 가려 독불장군처럼 구는 것이 브라이언이다. 당기는 구미가 없으면 웬만하면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그녀는 모처럼 평온하게 누워 있는 겸 최근 약간 신경 쓰이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별 거냐고 묻는다면 수긍하지는 못하겠지만.
벨이 평소보다 안 보인다. 아니, 평소에도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끽해야 코스에서 몇 번 모습을 발견하거나 타이밍이 좋으면 그럴 듯한 계기로 얼굴을 맞대었다. 우리는 학년도, 소속된 부서도, 기숙사도 다르니까 그게 당연했다. 그런 도중 벨, 카베르네 캠벨은 요즘 자신을 보면 어딘가 분발하는 눈치였다. 그게 단순한 “라이벌”로서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나……심증일 뿐. 아무것도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다면. 아니어도 벨이 본심을 드러낼 준비가 안되었다면 모조리 무산이다. 터프 위에서 아무리 뜨겁게 숨을 교차시킬 수 있어도──라이벌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런 식이었다. 브라이언과 그녀는 어쩐지 말로 설명하기 애매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벨이 어째서 요즘 보이지 않는지 계속 미궁에 빠진 상태이며 잊을 만하면 심심풀이로 추측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찾으러 갈 명분도 없었다. 만에 하나 찾아갔을 때 『여긴 왜 오셨어요?』라는 물음이 날아온다면 브라이언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이럴 때 브라이언은 능청맞게 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저 머물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언제나처럼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주기를, 이라며. 
입에 문 가지의 잎이 한 장 톡 떨어졌다. 3일, 1주, 2주……벨과는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히시 아마존이나 마야노 탑건에게 넌지시 화제를 던져봤지만 오히려 그들은 벨의 이변을 모르는 눈치였다. 겉으로는 지장이 없는 건가. 여태까지의 운이 이번에도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 같았다. 하다못해 가지의 잎이 먼저 떨어질 정도니, 답답하네……. 라고, 입 밖으로 내뱉을 입장은 아닌 것 같아 속으로 삼켰다. 아직 결말을 보지 못한 벨과의 관계는 아득했다. 우리가 라이벌을 제외하면 무슨 사이인지, 스스로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정의하지 못했다. 아직 브라이언은 『기다리는 쪽』의 기분인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각자의 목표를 향해 잠시 헤어질 날이 온다. 브라이언이 머지 않아 해외 원정을 떠나기 전……그전에는, 끝내야 하지 않을까. 우연과 운명에게 응석 부리는 짓을. 적어도 흐지부지한 채로 헤어지는 것만은 절대로 싫다고, 그것만은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외치는 것이었다. 수지 타산을 해보면 떠나는 건 이 쪽이니까 이 쪽이 마무리 지어야겠지. 사실 그 아이는 대가나 계산은 상관 않고 스스로 다가와줬으니, 아직 수지는 안 맞는 것 같지만……. 뭔가 없을까. 뭔가가 한 발을 뗄 결정타를 날려준다면. 
뇌 한 구석으로 미뤄둔 그것이 찾아온 건 그 때였다. 드로와의 참가 권장은 심볼리 루돌프 학생회장으로부터 담담하게 전해져 왔다. 『필요 없고, 귀찮은 장난질이야』, 『원하는 건 추억 쌓기가 아니야』라는 말에 되돌아오는 답. 
 
참가하는 건 네 자유야. 강제할 수는 없지.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드로와는 우리들의 시작을 뜻하는 행사야. 시작을 알리는 이 계절에, 파란만장한 출발 혹은 다가오는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마음을 다잡는 의식에 가까워. 네가 제대로 의지를 갖고 참가한다면 이 뜻을 알 텐데. 
너도 요즘 무언가 신경쓰이는 게 있지 않나? 자주 밖을 내다보고, 특정 장소를 힐끗거리고. 
짐작하건대, 드로와를 준비하면 반드시 도움이 될 거야. 덧붙여서 내가 생각하는 것까지 맞다면……그녀를 부탁하고 싶은데. 
 
그런 적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 상하게도 용케 맞춰서 입을 다물었다. 천리안의 황제님 같으니라고. 그런데 뒷말은 뭔가, 찝찝하게. 후배라도 자신에게 맡기려는 건가? 착한 가면을 뒤집어써서 착실히 지도해 주는 건 내 담당이 아니라고. 알 텐데, 루돌프라면. 
그러나 루돌프의 입에서는 히시 아마존에게서도, 마야노 탑건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1학년을 담당하는 댄스 강사가 애를 먹는 모습을 봤어. 드로와 시즌인지라 요즘 특별하게 페어 댄스 레슨을 진행하는데……레슨 안에 잘 되지 않으면 따로 보충 학습을 받는 식이야.
그중에서도 특히……상식으로는 어쩔 도리 없이 막혀서 보충 학습으로도 곤란한 학생이 있다고 하더군. 
네가 아는 사람이야. ──카베르네 캠벨을, 한 번 맡아볼 생각은 없나? 
 
────. 
 
…………. 
이야기가 끝나고, 학생회실의 문이 한 번 들락거린다. 브라이언은 루돌프의 제안 속에 담긴 뜻을 알려줄 파트너를 찾아나간다. 아울러 그녀와의 관계에도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며 보인 창문 밖에는 필 시기를 기다리는 벚꽃 봉우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벚꽃 피기 전의 봄이라. ──그러고 보니, 이 시기는……
 
이것은, 드로와의 연이 없던 자들이 장식하는 최고의 프렐류드. 


이제까지 드로와의 스테이지에서 벨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작년에도, 그 전년도에도, 그녀는 관객석 혹은 기숙사에 머물러 있었을 뿐. 그 이유를 뼈저리게 알고 있는 댄스 강사는 얼굴에 깔린 침체가 영락없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숨은 들릴락 말락. 내려오는 시선은 안 보이는 척 했다. 요즘의 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댄스 보충 학습에 매진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연습을 거듭해도, 보충 학습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도, 댄스 강사가 양손을 다 들어버리는 것이 벨의 페어 댄스 실력이다. 이 어찌나 저주받은 발놀림! 제 아무리 페어 댄스가 위닝 라이브와는 결이 다르다고 하지만, 『저건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벨은 상대방의 발을 밟는다. 발을 안 밟으려고 집중하면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버린다. 이것을 지적받으면 꼬인다. 넘어진다. 종결. 벨은 타인과의 호흡을 맞추는 것이 제겐 하늘의 별따기와 같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사죄를 숨길 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끝으로 겨우 보충 학습이 끝났다. 
 
‘그렇다면 왜, 올해는 변덕이 들었는가. ’ 
 
드로와는 트레센 학원의 필수 코스가 아니다. 물론 참가하지 않는 학생들도 여럿 되고, 실행 위원이나 관객을 담당하는 부류도 당연하게 있다. 벨에게는 다행인 이야기였다. 드로와가 인연이 아니라면 지나가면 돼. 계속 그렇게 덮어두면 다시 상종할 일은 없을 거라고. 뭣도 모르던 시절의 아팠던 경험을 자양분 삼아 심연에 깊숙이 묻어두며, 다시는 꺼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지 한세월이다. 
그래. 한세월동안 때때로 튀어나오는 충동도 억누르고, 굉장히 많이 묻어와서 그만 불룩 턱이 져버렸다. 
벨은 더는 평탄하지 않은 지면을 지나치지 못하고 걸려 넘어져버렸다.
 
(사람에게는 각자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게 있어. 보통 사람들은 장점을 부각시켜 자신의 역량을 펼쳐서, 단점을 덮어 살아간다)
(하지만……나는 어떻게 해도 페어 댄스만은 잘하지 못한다. 커버할 수 없을 정도로 날 때부터 치명적이게 못한다. 메우고 싶어, 억울해, 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보통 사람의 시작점에서조차 서지 못해)
(살아오면서 능력치값이 보통보다 떨어진 인생을 살아왔다. 이런 사소한 부분도 모두에게 뒤처져서 자격지심을 가지고, 머릿속에서 스스로가 낙오자라는 타이틀을 지울 수가 없어)
(게다가 페어 댄스란 혼자서만 힘내도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평범한” 타인과 호흡을 맞춰야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내몰려, 이윽고 발을 밟아버린다)
(한 번, 두 번……성격과는 관계없이 우마무스메에게 있어 소중한 신체가 짓눌리는 게 반복되면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하겠지)
(안다. 나같아도……당연히 불안할 거야. 이럴 바에야 달리기에 집중하자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모두의 댄스를 봐도, 대리만족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더 설움이 끓고 애가 탈뿐. 
최근에는 독특한 엑시비전 댄스나 베스트 드로와의 쟁탈전 등으로 더욱 고조되기 시작한 드로와를 보고, 벨의 심지에도 강한 불꽃이 깃든 것이었다. 
 
(늦어도 좋아. 드로와에 참가하지 못해도 좋아. 올해는 그저 데이트의 라인에 설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다면. 제발 어떻게든……이 미련을 끝내고 싶어서……)
 
──무슨 표정을 하는 거야. 
 
그녀의 행방을 찾아 방문한 스튜디오였다. 복도에서 작은 창문 너머로 지켜보았지만, 거기에는 고장난 로봇마냥 어색하기 짝이 없게 움직이는 벨이 있었다. 춤사위가 딱딱하다. 음악을 듣고는 있는 건지, 허공의 파트너를 의식하고는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표정이 심각했다. 괴로워서 눈을 찌푸리고,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깨문다. 미를 추구하는 자의 것이 아니네. 저건 춤이라기보다 거의 발버둥이다. ──일찍이 브라이언이 경험했던 것이었다. 벨의 모습에서 절망과 동시에 미련이 전해져 왔다. 
이 레이스의 세계에서 진화하기 전의 벨이 그랬다. 타인에게 부딪히는 걸 꺼려해 주춤거리는 모습. 제게 향했던 사양이라는 이름의 방어기질. 지금은 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
 
또 한 번 예상을 웃도는 문제였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에 망설인다. 멋도 모르고 내딛으면 관계 진전은커녕 다 망쳐버릴 것 같아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워낙에 브라이언은 남을 위해 자신의 영역까지 희생해서 봉사하는 성미가 아니다. 춤이라는 건 흥미도 없고, 더구나 남의 속깊은 곳까지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쪽이다. 따라서 해결한 전례가 없다. 달리기와는 경우가 달라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저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도대체가 감정만 앞서고 머리는 굳어서 어쩌면 좋을까. 애꿎은 이마만 툭, 툭 건드린다. 
그러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회상해본다. 루돌프의 전언에 따르면, 드로와는 기분을 다잡는 의식이다. 그 분위기 속에서 벨은 타개하고 싶어 한다. 그건 아마도 저 삐걱삐걱한 페어 댄스 실력……. 하지만 페어 없는 페어 댄스가 될 리가 없잖아. 파트너 없이 나아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 동생을 잘 부탁해. 
그 애는 도와달라고 할 줄 모르거든. 

 

……. 
 
아아, 그냥……가보자. 이러쿵저러쿵 고뇌하는 건 질색이다. 브라이언은 같이 거들어주며 착실히 지도해 주는 쪽이 아니라니까. 그녀의 방식은 타인의 잠들어있는 본능을 있는 대로 자극해 주는 것이다. 원래 벨은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꽉 다문 조개처럼 오므라드니까, 웬만하면 도발하지 않으려고 했지만……됐어. 데이트라는 악역을 자처해 주마. 
이때의 브라이언은 혀를 차는 행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하는 것이었다. 


어어, 어, 어째, 어째서. 제게 데이트 신청을. 


……가끔은 나쁘지 않잖아. 


저, 절대, 절대, 무리예요!
 
기껏 결심을 굳히고 자기 쪽에서 벨의 곁으로 찾아왔지만, 돌아온 답은 『절대 무리』란다. 이 쪽은 어떻게든 파고 들어보려고 하는데, 혀까지 깨물 뻔하면서 단칼에 거절하는 건 솔직히 뻘쭘했다. 일단은 다물고 듣자 하니……벨은 세상 경악하면서 자기가 거쳐온 어마어마한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한 시간동안 강사 선생님의 발을 8번은 밟았어요!” 
“안 밟으려고 집중하면 표정이 엄청나게 된다고요. ” 
“매번 보충 학습에 갔지만 진도는 다른 애들에 비해 점점 멀어질 뿐이고……. ” 
 
브라이언 씨는 제가 페어 댄스 젬병이라는 걸 모르니까 오신 거죠? 그, 권유하러 와주신 건 정말로, 정말로 기쁘지만, 이것만큼은 틀림없이 폐가 될 거예요. 
당신의 발만큼은 절대로 밟고 싶지 않아……. 물론, 발 밟아도 괜찮은 사람은 없지만요……. 
 
우마무스메에게 있어서 달리기의 일생을 결정하는 발을, 더욱이 동경하는 자의 발을 밟고 싶을 리가 없다. 무르고 위태로운 가치관. ……역전의 빈스토크를 제외한 벨은 아직 연약한 구석이 있다. 
벚꽃 피기 전의 봄. 이건 트윙클 시리즈의 세계에서는 한신 대상전과 오사카배가 주목을 받는 시기이다. TV에서는 전년도에 훌륭하게 부활한 빈스토크인 벨이 흘러나오기 바빴다. 밑바닥에서 올라온 그녀였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경기. 누구나가 부활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한 승리……. 그 시절의 영광과 페어 댄스와의 대립으로 주저앉은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되었다. 
 
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고르실 거면 저보다 다른 사람이 훨씬 나을 거예요.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랄 당신께, 꼴불견인 모습만 보여드려 죄송해요.
……부끄럽네요. 아직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 호소밖에 못하고……. 
 
그런데. 
──춤을 추기 싫다고는 하지 않는군. 싫었으면 애초에 여기서 연습도 하지 않았겠지. 
 
그, 건…….
 
왜 과거로 돌아가버리는 거야. 미련한 주제에. 
너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적어도 결정권은 파트너에게 줘야 하는 걸 알지 않나?
 
……그야, 레이스와는 다르잖아요. 
발을 밟아버린다고요? 민감한 부위이기도 하고. 그 전에 기분이 상하잖아요. 
선심 썼는데 괜히 떠안았다고 후회해요. 발에 대한 걱정과 시간 낭비라는 불만에 휩싸여서 결국 “그만하자”라고 듣는 전개……몇 번이나 겪었어요. 어째서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있어요. 없을 거예요……. 
달리기만으로도 벅차서 감당 안되는 제가……타인을 희생해서라도 약점을 극복시키고 싶다니. 
빈스토크가 아닌 저는 아직 불완전하고, 어설퍼요……. 그러니 우유부단하게 폐를 끼치고 마는 거겠죠. 누구에게나……. 
 
한숨을 내쉰다. 무거워. 분위기가 무지하게 무거워. 이런 건 역시 함부로 건드릴 게 아니다. 위태위태하게 외줄 타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 거북해. 너도 분명 내가 말을 꺼낸 걸 후회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전해야한다. 어물쩡한 각오로는 아무 것도 개선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너와 이 관계에 결착을 짓고 싶다고 생각한다면……말해야 해. 
 
──그래도, 내가 너를 택하고 싶다고 한다면?
 
에, 어째서요……?
 
봐버렸으니까. 그럼에도, 네가 춤을 추는 걸. 
우연이라도 봐버린 이상……네 불완전의 끝을 보고 싶어. 
 
(……왜 그렇게까지……. 날, 위해주는 거야?)
(나같은 사람에게 먼저 데이트가 되어달라고 권유하러 오다니……원래라면 당신은……)
 
그러니 지켜봐 볼까. 네 가치가 달리기에만 있는지. 
넌 이미 레이스에서 배웠을 것이다. 승리를 위해,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모두가 위로 올라가려고 해.
그중에서 대다수가 밟히고, 짓눌리고, 밀려서……누군가가 승리하면 누군가는 패배의 쓰라림에 눈물을 삼키지. 민폐 같은 건 끼칠 수밖에 없어. 
그런 건 페어 댄스도 비슷하잖아. 독 밖에 되지 않는 그 착해빠진 굴레에서 벗어나와. 
“빈스토크”는 네가 쓰기 나름인 능력의 일부야. 난 그게 전부가 아니란 쪽에 걸겠어.
내가 너의 데이트가 되어볼테니──향상심을 가져. 설령 내 발을 밟게 되더라도, 도전해라!
너와 내가 만신창이가 되어도, 오기로라도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하게 만들어주지!


벨은 뒷통수라도 맞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고집해 주는 사람이었나? 남의 발을 밟는 제 악역이란 자리를 뺏어, 대신 타인을 지르밟는 고통을 참아보라고 자처한다. 그 말이 자신의 시큰한 미련까지 무참하게 후벼 팠다. 그늘 속에 꼭꼭 숨겨둔 보잘것 없이 초라한 자신을 찾아내,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자 절대로 저버리지 않아 줄 사람. 나리타 브라이언 앞에서 더 이상의 변명은 망연자실하게 녹아버렸다. 정말로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실까? 사실은, 사실은 저도 말이죠. 곧 벨은 미약하게 떨리는 목을 부여잡고, 마침내 바깥 세상의 빛을 보고 싶어 했던 기대감에 응해주었다. 
 
실망하실 거예요. 아니, 그래도 중간에 두고 가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고집해 줄 사람, 또 없을 테니까……. 
저도, 저도 사실은, 실패로 끝내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싶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만약 기회를 만들어주신다고 하면, 붙잡아서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고 싶어요.
그러니까……! 각오하고 저의 데이트가 되어주세요, 브라이언 씨!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서, 일단 정확하게 어디가 안되는 건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가볍게 한 곡 출 것이라고 예고하자 벨은 손끝이 움찔거렸지만, 이내 주먹을 꾹 쥐었다. 그녀를 리드하는 도중에 혹시 발을 밟아도 괘념치 않을 것을 당부, 하자마자 발을 밟혔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집중하라』. 중요한 것은 집중한 상태에서 무사히 마지막까지 안무를 이어나가는 것. 정신 차리고 집중한 벨의 얼굴은 누가 봐도 부담스럽게 미간에 굴곡이 생겨버렸지만, 전처럼 괴로움은 느껴지지 않아서 일단 넘어갔다. 
알게 된 것──벨의 전체적인 동작이나 기본 스텝은 생각보다 잘 되어있다. 습득력도 나쁘지 않아. 문제는 “평범”이라는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고 있다. 파트너를 과하게 배려해서 위축된 것도 있겠지만……브라이언이 억지로 『착한 가면』을 뒤집어써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나날 속 드러난 패턴. 긴장해서 발을 밟고, 그걸로 위축되어 움직임이 딱딱해지는 영향을 받고 있다. 본질을 바꿀 수 없다면……. 
 
(파트너를 배려하지 않아야 해. 그 배려가 자신을 좁은 곳에 내몰고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정해진 틀에 갇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본능이 이끄는대로 나아가야 한다. 
 
벨. 여태까지 배운 건 다 잊어라.
 
네!? 그, 그게 무슨 말이세요?
 
우리들은 평범한 건 영 안 맞는다. 규격 외의 길을 개척해야 할 거야. 
 
규격 외라니, 어떻게……. 
 
아무도 그 앞을 달린 적이 없으니 불안이야 하지.
그래도 갈 수 있지 않나? 너와 나는, 이미 옛날부터 스스로들 진창길을 가자고 결심한 사람들이니까. 
──우리라면, 우리들이니까 가능해.
 
──!
 
왕도라는 정석을 벗어난 떨거지들은 문제아일 뿐일텐데. 이 사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쳐서 보는 이의 투지를 불타오르게 한다. 그리고 벨은 그에 응해서 가장 뜨거운 화력으로 타오르는 사람이니, 필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 
브라이언은 벨에게 위닝 라이브에서 자유롭게 내세우던 것처럼 자기다움을 어필하라고 전했다. 안무 형식을 사전에 의논하는 건 소용없어. 즉석에서 강렬한 기합을 발산시킨다. 릴레이를 주고받으며 뜨거워지는 열기──그게 대중도 우리도 원하는 것이겠지. 
 
그저 부딪혀라. 내딛고, 휘둘러. 
겁내지마. 어떻게든 받아볼 테니까. 반대로, 너도 어떻게든 받아봐라. 
할 수 있겠지. 
 
즉, 벨은 자기다운 댄스를 자각하고 설 자리를 널리 넓혀야 했다. ──나다움이라……. 시험해보고 싶다. 브라이언과 합을 맞추는 상상을 해본다. 무엇에도 얽매여있지 않고, 상대의 새로운 자극을 탐닉하며 독촉하는 우리들……. 그 아무 것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 해방된 모습을 떠올리면 이 너머에 찾던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떠오른 희망에 눈을 반짝이며 골똘하게 윤곽을 그려내려던 중 탁, 타닥. 난데없이 우웅거리는 진동 소리와 함께 스튜디오 구석에서 벨의 핸드폰이 바닥을 치며 난동을 부려 순식간에 상상도가 깨졌다. 우왕좌왕하며 황급히 핸드폰을 들어 올렸으나, 타이밍 좋게 옆에 브라이언의 핸드폰도 쌍으로 울리기 시작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그녀에게도 급히 난동부리는 것을 건네주면서 자신의 핸드폰에 나오는 발신인의 이름을 흘겨보니 히시 아마존이라고 적혀있다. 자신이 속한 미호동의 기숙사장이었다. 겨우 침착해진 뒤 받아 든 핸드폰 너머에는 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벨! 지금 어디야!?
 
넷!? 지금……스튜디오인데요. 드로와의 페어 댄스 연습을 하느라……. 
 
하아……. 다행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구나. 
통금 시간이 진작에 지났다고! 해가 저물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돌아와!
 
앗!? 네……!
 
급작스럽게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대범하지 못한 자신이 규칙 위반했다는 사실도 사실이었지만, 그걸 전화가 올 때까지 몰랐다는 게 적잖게 충격이었다. 그만큼……춤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건가. 몰두할 만큼 진전되고 있다는 건가──. 
반대편에서 브라이언이 부루퉁한 얼굴로 돌아오는 걸 보면, 아마 저 쪽도 기숙사장에게 똑같은 소리를 들은 듯 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철렁. 무색하게도 이로써 오늘치 마법이 풀려버렸다. 
……하긴, 그렇겠지? 돌아가지 않으면 괜히 소란이 될 것이다. 히시 아마존도, 룸메이트도 걱정할 테고……늦장을 부리면 브라이언에게도 피해가 갈 터. 그녀는 이미 기숙사장과의 통화로 춤 출 기분이 사라진 것 같았다. 벨은 얼굴에 미미하게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결국 스튜디오를 뒤로 하고 다음 번에 마저 이어가자고 답했다. 내일, 더 완전한 모습으로 연습하면 돼. 애써 납득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타올로 얼굴을 한 차례 닦아냈다. 미련 맞은 손길이 조금 둔했으나 곁에서 지켜보던 브라이언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것이 피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둘은 마침내 스튜디오의 불을 끄고 문단속을 하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같이 하교하는 건, 처음인가?)
 
기숙사장들이 말한대로 밖은 이미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일렬로 나란히 선 가로수와 가로등의 풍습에 맞추듯이, 우리도 서로의 옆을 차지해 걷고 있었다. 벨은 허공에 시선이 고정된 걸 보면 어딘가 생각에 잠긴 것도 같았다. 성실한 녀석이니까, 배운 것을 돌이켜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일부러 묵묵하게 숨을 죽였다. 침묵은 긍정. 비를 피해 도착한 차창 아래에서 서로에게 암묵적으로 곁을 허락했던 그날처럼,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존재를 수긍한다. 상식과는 다르지만 어쩌면 그래도 교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그게 우리에겐 최적의 답이라며. 이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어느샌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내려고 노력했다. 점심은 무얼 먹었는지, 다음 수업은 무엇인지. 시시콜콜하고 영양가 없는 주제.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정말 그런 얘기들만 하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브라이언은 영문을 몰랐지만 벨이 건네는 말에는 단 하나의 악의도 없었으므로 하던대로 점차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타인의 마음을 짓밟지 않는 고운 배려에 이 쪽도 똑바로 예의를 갖춰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옮아버렸다. 그럼 또 그 아이는 재잘거리다가도 저의 눈치를 보며 주춤한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는 장난질이나 도발 같은 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걸 제외한 나머지……조용했다. 지금처럼. 
더 이상 침묵은 편안하지 않았다. 벨을 부정한다는 게 아니었다. ──브라이언 쪽이, 초조했다. 주변인과는 상반되게 말재주나 붙임성도 없는 브라이언이, 우스꽝스럽지도 않고 부자연스럽지도 않은 형태로 널 마주할 수 있을지. 아니지. 벨은 그러한 리스크를 안고 다가옴에도 자신은 이제 와서 말로 꺼낼 준비가 안된 것이 한탄스러웠다. 나서는 것이 껄끄러워 뒤에서 지켜보고 사소한 선의로 퉁치는 것이 무슨 자랑이 되나. 그런 숨겨진 조력자라는 건 사실 숭고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막상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수치심의 포장이었다. 
그 때 벨이 뒤에서 우뚝 멈춰 섰다. 우리는 반 걸음 정도의 차이가 나, 나란하던 일렬이 무너졌다. 고개를 살짝 돌려봐도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고, 가로등의 불빛에 그늘이 져 벨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브라이언은 몸을 완전히 돌려 요지부동인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 자세하게 표정을 살펴봤다. 고개를 숙인 벨과 시선을 맞추려고 같이 몸을 굽히니, 벨에게는 입을 꾹 다물고, 고심한 눈에 힘을 줘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벨?
 
……저. 
아까는……그렇게 말했지만……저,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걸, 역시 알고 싶어요. 지금.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해서, 속이 술렁거리는 느낌이 걷잡아지지가 않아요……. 
……조금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까의 연장인가? 더 늦으면 아마 씨가 잔소리할 텐데. 스튜디오에 되돌아가서 춤을 추려면……. 
 
……. 
──그럼 여기서 추지 않을래요?
 
뭐?
 
주위를 둘러본다. 가로수 너머로 보이는, 드넓은 잔디와 저 멀리 하나의 고목이 자리 잡은 곳. 안뜰이다. 통금 시간이 훌쩍 지나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끌벅적하던 함성과 발소리로 넘치던 이곳을, 지금은 오직 벨의 목소리만이 차지했다. 그 울림을 신호로 치켜뜬 벨의 눈에는 익숙한 불꽃이 깃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리 없이 이글거리는 열, 옅게 풍겨오는 그녀 특유의 압박감. 마음만 먹으면 여기를 무대를 만들 수 있는──빈스토크다.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이 순간의 열이 한 번 식으면 다시 재현하기는 어렵다. 이걸 꺼뜨리기도 아깝다는 느낌을 그대로 이해한 브라이언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연습 재개를 받아들였다. 


‘과연 반전은 일어날 것인가?’
 
벨의 스텝은 아까보다 침착해져 있었다. 얼굴에 과하게 굳은 기색은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어깨의 힘을 풀 것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마치 레이스 직전, 경기장 패덕에서 손발을 풀고 심호흡을 하듯이……게이트가 열리는 순간을 벨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옥죄어졌던 심장은 준비된 발 대신 쿵쿵거리며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곡조가 하이라이트에 다다른 순간, 동작은 크게 흔들렸다. 브라이언도 그만 동요되고 말았다. ──이건 연습에 없는 안무. 즉, 애드리브다. 뿐만 아니라 벨은 그걸로 멈추지 않고 아주 제멋대로 움직여주기 시작했다. 손만 잡고 있을 뿐, 발놀림을 예상할 수 없어 짝이 안 맞았다. 일순 따라가지 못해 휘청거리니 벨이 브라이언의 허리를 받쳐주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리드까지? 도저히 조화롭다고는 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군더더기 많은 댄스. 
그럼에도 벨은 이게 마땅하다는 표정을 하며 가감을 줄이지 않았다. 
 
겁내지마. 어떻게든 받아볼 테니까. 반대로, 너도 어떻게든 받아봐라. 
할 수 있겠지. 
──하, 가만히 리드당할 것 같나……! 
 

맹건님

본래보다 격동적이게 된 안무에 브라이언이 응한다. 자기보다 실컷 날뛰고 있는 벨 앞에 땅을 박차며, 그녀 또한 본능을 풀어헤쳤다. 언뜻 주도권 싸움으로 보일 정도로 이끌고 이끌어지기를 반복하는 둘. 리드를 번갈아가면서 서로의 심정을 건드리고, 따라올 수 있겠냐고 도발하여 안무는 더욱 세차게 가미된다. 공간을 전부 장악할 기세였다. ──그러면서 서로의 허리춤은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가 더 놀라게 해주겠다며 어린아이 장난질을 주고받는 듯한 이 분위기는 무엇인가. 브라이언이 애드리브를 펼치면 벨도 당할 뻔하여 휘청거리고, 이내 가슴속의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어서 웃는다. 본능대로, 이대로 흘러가고 싶어, 춤추고 싶어. 시간이 조금만 느리게 갔으면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해본다. 벨의 희번득한 눈동자는 하늘의 별빛을 가득 반사하여 일렁인다. 환희에 북받쳐서 입도 헤 벌려 점점 어쩔 줄도 모르게 짓는 미소가 앳되었다. 
 
(나 참……)
(무슨 표정을 하는 거야)
 
곡을 듣고는 있는 건지, 파트너를 신경은 쓰는 건지. 
처음 그녀를 봤을 때와 의문의 형태는 일치했으나, 그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다는 걸 지금은 확실히 안다. 
사박사박 잔디 밟는 소리와 바람 부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우고, 마지막에 들린 건 자신들의 심장소리였다. 
 
……. 
 
이윽고 안뜰은 숨 차는 소리로 메워졌다. 
발은 한 번도 밟지 않은 채로 끝났다. 이것이 그들의 댄스──본능의 형태이다.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들만을 위한 결과. 브라이언은 방금까지 맞잡았던 손을 쥐락펴락하며, 춤추던 순간의 고양감을 되새겼다. 
 
이거군……. 아직도 몸에 감각이 남아있는 것 같아. 후우……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지?
 
말로는……, 어떻게 자아내야할지. 조금이나마, 꿈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요. 
눈앞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받고, 별을 등지는 브라이언 씨는 눈부셔서……. 바라보다가 빠져들어, 조급함을 잊었어요. 
그렇게 강하게 본능을 발휘하는 당신은……역시 강해. 빛나고 있어. 그런 당신을 동경해요. 동시에 틀림없이……뺏긴 마음을 돌려받고 싶다고, 치밀어 오른 거예요. 
당신이 눈부시면 눈부실수록 마음을 빼앗기고, 저도 한 방 먹이기 위해 있는 힘껏 자극받아 내딛을 수 있었어요. 그건……어쩌면 “나다움”으로 이어지는 일일지도 몰라요. 
『꿈을 쫓아간다는』 제 꿈의 일부죠. 거창하진 않지만 또다시 저는 원하는 걸 쫓아가고 있는걸요. 
온전히 나만의 소망으로 이루어진, 나만이 이룰 수 있는 내 꿈. 그러니까 저는 저의 방식을 믿기로 했어요. 당신도, 등을 밀어줬으니까. 
──감사해요, 는 당일에 춤으로 전할게요. 어떤 식으로 나올지 두 눈으로 직접 지켜봐 주세요. 
 
……역시, 넌. 
완벽하게 우마무스메다. 
(네 가치는 달리기에만 있지 않았어. 너의 남을 집어삼킬 듯한 불꽃은, 점점 채워지고 있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체감하며 그 생기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불 붙어라. 타올라라, 카베르네 캠벨. 너는 언제 어디에서나 빈스토크.
휘감으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그 뿌리로, 회장 전체를 압도시키러 가자. 


──자, 올해도 찾아왔습니다. 달조차 축복의 빛을 내리는 밤, 당신과 함께, 리뉴•드로와트!
사랑스러운 데이트는 찾으셨습니까? 정열적인 댄스는 준비되었습니까?
이 날을 위해 얼마나 연마하셨나요. 이 순간만큼은 실력을 감추지 말고, 마음대로 뽐내봅시다. 
여러분에게 달콤한 한때를 선사해 줄 드로와, 개막 시간입니다!
 
구두 ok, 드레스 ok……. 근데 드레스는 뭐랄까, 생각보다 더 치렁치렁하네요. 어색하다…….
 
불편하면 찢으면 되지. 
 
네!? 안 돼요! 학원 소유물이니까! 그, 그리고 원래 찢으면 안 되잖아요!
 
훗, 이제 와서 『원래』를 찾는 건 이상하잖아. 
 
아……그건, 그럴지도. 
 
준비가 다 되었으면, 어서 보여주러 가자고. 
──손을. 시시한 눈을 한 녀석들에게 한 방 먹여보자. 
 
와앗. 후훗……. 저도 기대돼요. 모두가, 우리들을 눈에 새겨 넣어주었으면……!
 
두 사람은 “엑시비전 댄스”도 “베스트 드로와”도 아닌 자리에서 가장 뜨겁게 회장을 사로잡을 것을 결의하며, 다져진 안무를 내세운다. 처음 보는 관객들은 흥미 본위로 두 사람을 흘기다 지나친다. 그러다, 바로 다시 시선을 돌릴 정도로 누구나가 경악했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시합에 가까웠다. 온몸을 부딪히면서 찌르는 펜싱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드넓은 보폭, 심히 자유로운 이동. 무엇이 정석이고 무엇이 애드리브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저러다 충돌하는 게 아니냐며 보는 자들은 조마조마하면서──이윽고 점점 눈을 뗄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저들의 안무에서 나오는 열기가 머릿속을 어지럽혀 소란이 일었다. 엉망진창으로 보이지만 딱 맞는 호흡으로 신기하게 이어지는 댄스. 저 발놀림은, 저 손짓은, 어디까지 나아가는 걸까. 저 퍼포먼스가 어디까지 현란해질까! 회장에서 떠오르던 수군거림은 자취를 감추고, 오롯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뽀손님

(……내가, 자처해서 드로와에서 춤을 추고 있다니) 
(하물며 데이트 신청도 내가 했지. 그만큼……네가 내게 간절했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어)
(알고 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네가 라이벌과는 별개로,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 한 것)
(그 모습은 늘 완벽하지 않고 서투르기만 해서……무심코 웃음이 나와 내 안의 벽이 점점 허물었다)
(불완전한 것들을 지켜보는 건 지긋지긋했을 터인데. 다들 겁먹고, 꺾이고, 후퇴했으니까……. 나의 갈증은 충족되지 못하고 더욱 말라 아프기만 했다)
(그런데 너를 보면 이런 생각도 들어)
(처음부터 전부 예상했었더라면, 분명 너를 지켜보지 않았겠지)
(언니가 말한 대로 패배에서 태어난 열을 맛보지 못했을 테니까. 모든 걸 내다봤다면 고생은 하지 않았겠지만……동시에 애타는 감정도 몰랐을 것이다)
(……재미없어. 한 마디로 퉁쳐버리고, 돌아섰겠지. 너희들의 진가도 모르고)
(유동적인 너희들은 기대를 업고 정해진 운명을 깨부수는, 그 열의 집합체……. 너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 일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더 이상 전 같지 않게 매일이 색달라. 그래, 이 일상이 내겐──)
 
그들은 상식을 깨고 전례가 없다 하더라도 거듭 나아가기를 선택했다. 용맹함과 맹렬함을 가슴에 품고, 건조한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그 아픔을 아는 자들끼리, 상대를 꽉 잡아준다. 미련할 정도로 끈질기게 상냥함을 잃지 않아 온 자들. 동일한 세기에 부딪혀 나오는 그들만의 공명.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벨이 춤을 못 추는 걸 알던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다. 드로와에서 쭉 들러리로 취급되던, 이런 사람이라도 출 수 있어. 바뀔 수 있어. “부활”할 수 있어! 라고 온몸으로 증명을 외치는데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속에 응어리 진 편견이 맥없이 풀려 해방된다. 대신 그곳에는, 비로소 가능성을 그리는 희망이 흘러들어왔다. 
곡이 끝나자마자 아무도 걷지 않은 가시밭길을 전진한 둘은 무수한 박수를 받았다. 잔뜩 감화된 성원 중에는 둘과의 만남에 다행을 표하는 감사도 섞여 나왔다. 밀려 나오는 환호성에 만신창이들은 홀로 품었던 고독함이, 수없이 입어온 상처가, 보답받은 느낌이 들어 심장 안 쪽이 뭉클해졌다. 더는 우리들의 존재가 부정받지 않는다. 따뜻한 인정에 대한 답례로, 후회도 망설임도 없이 허리를 굽힌다. 그들은 악역도 엑스트라도 아닌, 그들만의 무대에서 빛나는 주역이었다……. 


아직 드레스 차림이군. 
 
앗, 브라이언 씨! 아직 안 돌아가셨네요. 
그게, 오늘 일을 곱씹어보고 있었어요. 춤추면서 발도 한 번도 안 밟았고, 표정도 괜찮았고, 모두에게 박수도 받고. 그러다 보니……아직, 심취하고 싶었어요. 
 
그런가. 올해부터는 이 시기에 떠올릴 일이 하나 더 생겼겠군. 
 
여기는 회장 밖. 벨은 바깥의 찬 공기를 쐬면서 이번 일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순간순간 느꼈던 것들을 전부 끌어모아서 영원히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미련만 끌어안고 좀처럼 발을 못 떼는 나에게 또 한 번, 이 사람이 등을 밀어주어 오늘이란 날이 만들어졌지. 감상에 젖어 회상하고 있을 때……벨은 퍼뜩 떠오른 것을 브라이언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기……그런데, 브라이언 씨는, 어째서 빈스토크가 아닌 저도 믿어주신 거예요? 데이트를 신청할 때부터요…….
 
──그래도, 내가 너를 택하고 싶다고 한다면?
봐버렸으니까. 그럼에도, 네가 춤을 추는 걸. 
우연이라도 봐버린 이상……네 불완전의 끝을 보고 싶어. 
 
……. 
(하기사, 물어보겠지. 돌변에 가까웠으니까)
(이건 네 언니가 『우리 동생을 잘 부탁해』라고 사뭇 진지하게 말해서……)
(──아……근데)
(이제 그런 겉치레, 필요 없잖아)
(이런 기회, 두 번이나 놓칠까……)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되니까. 
 
뭐를요……?
 
네가 나에게 의식적으로 다가와주는 것. 
최근 내 일상은 바뀌었어. 너와 만나는 횟수가 늘었으니까.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졌으니까. 
 
! 브라, 이언 씨…….
 
왜인가, 했지. 우리는 라이벌이기만 하면 됐으니까. 
사력을 다해서 승부했으니 서로 만족하고, 여기서 끝. 그럼……더 이상 다가가려고 노력할 필요 없나?
그에 대한 답을 너는 먼저 깨우쳤어. 
만족하지 못해. 알아가고 싶어져. 우리들은 변하고, 변하는 서로마저 마음에 들이고 싶으니까. 
그래서 너는 노력한 거지. 설령 다가가는 행동이 서툴더라도, 때때로 꼴사나워진대도. 
……난, 네 정성을 그저 견고하게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이에 내가 특별히 반응하지 않아서, 모르는 사이 네가 오해한 일도 번번이 있었을지도 몰라. 
우린 언젠가 각자의 목표를 위해 갈라설 일도 생길 테고, 시간이 무한한 것도 아니다. 의식한 순간, 전해야 할 건 바로 전해야겠지. 
네가 서툴러도 노력한 것처럼……나도 서툰 말이라도 표현해 보겠다. 
 
브라이언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가만 두고 벨과 제대로 눈을 마주친다. 겨우 내려진 답을, 무엇도 변질되지 않게 전하기 위해. 
 
──너와의 나날이, 소중해지고 있어. 
애착이 생겨. 너와, 트레이너와, 모두와 지내는 이 일상이, 다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값져. 단 한 명이라도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더는 보고도 못 본 척 할 수 없을 정도로 애틋해졌어. 함께 보폭을 맞춰나간다는 게, 이런 귀중한 느낌이었다니. 
그걸 네가 알려줬다. 매 순간 정성 어린 너라서 가능했어. 
내가 모르는 열을 빚어 만든 것 같은 그런……너와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도 너같이 말해봤다. 어때…….
 
그렇게 말하는 브라이언의 얼굴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표정이라. 지나가면서 말로만 들었던 그녀의 무른 어린 시절이 보인 느낌이었다. 
동심. 한없이 작고 여린 모습도 꺼내 보여줄 정도로, 벨의 열에 감화된 건 관객뿐만 아니라 그녀의 파트너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이었으면 가당키나 했을까. 동경하는 그녀가 자신과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해주는 상상이……. 꿈에서도 못 본 광경에 이제는 더 이상 낙오자인 카베르네 캠벨은 없다는 걸 실감한 나머지, 감격은 결국 말보다 눈물이 먼저 맞이하러 가버렸다. 
 
……훌쩍……. 
 
!? 누, 눈물이……우는 건가……!?
 
그, 그러게요. 뭔가……여기에 오고 나서 유독……눈물샘이 더 약해진 것 같아요. 텐노상에서도 울었고…….
그래도, 저……
트레센 학원에 오기를 잘했어요. 달리기를 좋아하기를 잘했어요. 
만약, 인생을 다시 반복한다고 하더라도……그걸 위해 이때까지의 고난이 또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분명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여기에는 나의 진심에, 열성에 부응해 주는 상냥한 사람들만이 곁에 있어……. 당신에게 다행이라고 들은 저는, 행운아네요…….
 
……나 원. 이런 걸로. 
이렇게 남이 행복해지는 걸 보는 건……이상한 기분이다. ……속이 간지러워. 
──벨, 나와 한 가지 약속하지 않겠나?
더 이상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게, 자신을 믿어라. 
꺾일 것 같으면 오늘을 떠올려.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어떤 시련이던 뛰어넘어라. 
언젠가 우리가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만나면 이 나날을 잊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서. 
거대해져라, 벨. 세계 어디에서 봐도 네가 보이게끔, 바오밥처럼 거대해져라. 
 
브라이언은 새끼손가락을 들어 벨에게 건넨다. 그녀는 먼 미래조차 함께할 증표를 나누고 싶었다. 이제 브라이언에게 있어 벨은 라이벌이자 전우라는, 친애하는 존재였으니까. 그 모습에 벨은 글썽이면서도 환희에 벅차 맑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도 보러 가도 되나요?
 
좋을 대로 보러 와. 너 정도면 귀찮지 않아. 나도……갈 테니까. 
 
또 실수하고, 발을 밟는 일이 생긴다면요?
 
그럼 미안함보다는 나에 대한 고마움이 듣고 싶어. 
넌 마음만 먹으면 된다. 
 
……아하하. 저를 잘 아시네요. 
 
그래도 내가 모르는 너는, 아직 있잖아? 더 알고 싶어. 
 
……저도요. 
당신에 대한 것도, 나 자신에 대한 것도. 
 
벨도 그녀에게 똑같이 새끼손가락을 내건다. 약속이야. 책임감 강한 두 사람이 절대 깨뜨리지 않을 약속. 무거운 책임이 동반되지만 그럼에도, 그 이상으로 서로가 소중하다. 
이 날 밤, 아득하리만치 까마득한 하늘에는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것만 같은 달이 빛을 내비쳤다. 
그리고 하늘 아래에도, 반짝이는 달장식을 한 우마무스메가 더는 풀이 죽지 않고, 둘도 없이 애틋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카베르네 캠벨은, 이런 사람이네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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